낯선공간, 한지에 채색, 133x75cm, 2011

Emptiness-한보아파트, 한지에 채색, 200x120cm, 2015

고립, 한지에 채색, 162x130cm, 2013

알수없는 시간, 한지에 채색, 73x60cm, 2012

끊어진 관계, 한지에 채색, 162x130cm, 2013

통시적 풍경, 한지에 채색, 130x200cm, 2011

흐려진 시간, 한지에 채색, 120x200cm, 2011

보이지 않는 사람

 

부재된 공간에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풍경 속에는 타자들이 들어있으며 타자의 얼굴은 부재된 풍경으로 작품에 보여 진다. 샤르트르에게 부재는 존재의 무(無)가 아니다. 현전과 함께 존재의 방식중의 하나로 타자가 어느 장소에서 부재한다고 할 때, 이는 타자가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한 장소에서 타자는 존재의 사실성과는 대립하는 형상이나 타자가 존재했었음의 실재성과는 대립하지 않는다. 일일이 열거 못할 시간의 역사와 남겨진 흔적들로 타자들은 빈 공간에 실재로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함(존재했었음)을 드러낸다. 녹이 쓴 철문과 깨진 시멘트 담, 모서리가 둥글어진 계단, 떨어져 버린 주소판, 버려진 침대 스프링, 옥상에 방치된 살림살이들, 빈 창문 등 모두가 존재의 증명임과 동시에 부재의 증명들인 사물이다.

이들은 자신의 몸으로 부재한 낯선 풍경을 만들고 공간에 묶인 시간의 덩어리들을 증명하며 동시에 부재라는 존재로 재탄생한다. 그 모든 사물들은 결코 녹녹치 않은 삶의 시간들을 몸으로 맞으며 변화의 시간들을 직접 표현해준다.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겪었을 이야기와 앞으로 다가올 시간까지도. 변두리라고 불리는 곳으로 갈수록 이런 증명들은 더 많은 자료를 확보하고 간직한 채 나에게 손짓을 한다. “세상에 나를 보여 주세요” , “내가 가진 이 아름다운 모습들을, 그들이 만든 시간들을 그들에게 상기시켜 주세요.” 라고....

늘 새로움과 변화의 갈망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고 새로움의 미학에 맞춰 괴상한 노래만 하는 고상한(?) 기득권자들은 이 아름다운 풍경들을 밀어버리고 본인들 기준에 맞는 새롭고 깨끗한 세상을 다시 만들겠다느니, 한발 더 나아가 다른 대안이라며 뱉은 대책이라는 것이 박제화 된 공간으로 재탄생시켜 교육의 장소로 만들겠다는 어처구니없는 말들이 고작이다. 진정한 부재마저 소멸시켜 또 다른 부재의 생산 장소로 때만 되면 없애주겠다며 목에 핏대 세우고 외치더니 이젠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말들의 울타리에 가둬져 오도 가도 못하는 지경이 된 듯하다.

눈앞의 사라짐이 오래된 사진 속에 남아 있다 해도 그것은 바르트가 말하는 돌이킬 수 없는 주체의 죽음이며, 지금 여기에 없음을 각인시키는 존재증명, 즉 부재증명인 것이다.

부재의 풍경을 사진에서의 존재의 죽음이 아닌, 무언가 더 덧붙여지고 다시 이어갈 수 있는 여지가 남아있는 붓질의 회화로 드러내 본다. 부재한 이들의 삶의 시간만큼 종이 속으로, 또 종이 위로 끝이 날 것 같지 않은 손놀림은 여전히 나의 현존을 증명해주며, 나에게 삶의 의무를 부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