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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패, 한지에 채색,각 41x32cm, 2014

​문패, Door Plate

도시는 개인과 집단이 모여 삶의 주체를 이루는 실존적인 장소로 인간의 삶의 의미와 실재 사용되는 사물, 그리고 인간들의 활동으로 가득 찬 공간이다. 이러한 인간의 실존적 삶터인 도시 공간에서의 장소 개념은 그 장소에 존재하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의 시간과 기억이 공존하며 그 시간의 궤적으로 생겨난 감정들이 내포되어 있는 영혼이 깃든 공간이라 하겠다.

 

건축가 정기용은 뉴욕을 수직 수평으로 접힌 주름의 도시라고 표현했다. 나는 나의 23년 시간이 녹아 있는 서울이 김나는 시루떡과 같은 도시이길 바란다. 일정한 크기와 두께로 켜켜이 쌓여진 사이사이로 팥알들이 온전하게 혹은 뭉개진 형태로 속속들이 차 있는 아직 식지 않은 김나는 시루떡 같은 도시로 존재했으면 한다. 치열한 사람들의 삶이 흰 바탕으로 쌓이고 다시 또 다른 색깔의 삶들이 진행되고 다시 흰 빛으로 변하여 저장되는 역사의 반복 속에서 그 시간이 고스란히 평등한 삶의 단층면(fault plane)으로 드러나 주길 바라는 마음이 작업의 시작점이 되었다. 삶의 일상적 장소들이 만들어낸 시간들은 결국 역사의 겹이 된다. 서울의 생경하지 않은 언제 어디서든 한번은 마주쳤던 것 같은 낯익은 도시 한 구석의 풍경과 사물들은 알 수 없는 사이 내 몸에 들어와 자리했으며 가슴이 발걸음을 옮기게 하는 끌림을 가져 다 주었다. 도시의 근간을 이루는 개인들의 사적인 장소들을 들여다보고 사적 장소들이 만들어내는 각기 다른 이미지와 흔적들에 내포된 감정과 가치를 겹겹의 시간을 경험하며 표현된 화면에 드러내 보인다. 타인의 삶에 대한 관심과 그들이 만든 시간의 기록은 그 자체로 텍스트화 되지 않은 소설과 같고 그 속의 사물들 (문패, 우편함, 초인종, 대문, 전구, 벽의 낙서까지도)은 너무도 훌륭한 주제로 다가온다. 채집된 장소와 그 사물들 중 특히 문패(門牌)는 사람의 얼굴이 개인적인 삶의 역사와 정서를 표현하고 그 흔적을 간직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얼굴을 대신한 문자로 된 사물이며 사적 장소의 가장 외부에 존재하는 삶에 대한 증거물이자 개인의 문자화된 민낯이다. 개인적으로 고립된 듯 보이는 사적 장소들이 시대를 공유하는 공동체의식과 타인을 이해하고 서로 이해의 대상이 되어 함께 하고자 하는 일상을 만들기 위해 각자가 준비한 소통의 일차적 산물이 문패이며, 그 주변에 외부로 드러나 있는 대문, 초인종, 우편함 등이 이차적 수단의 쓰임새를 지닌 사물들인 것이다.

 

비록 비슷한 모양새를 가진 기성품들이지만 배치나 쓰임의 횟수, 개인적 애착심등의 차이로 그 사물들은 엇비슷한 듯 다른 얼굴들을 외부에 드러내며, 그 사물들로 인해 점유한 생활공간에 애착심이 부여되고 생활경험이 쌓이게 되면 그 장소는 인간을 위한 장소로, 의미와 정서가 남다른 존재론적 장소로 변모한다. 그 모습들은 사적장소의 서로 다른 장소감(場所感)을 형성하고 개인적 의미를 형성하는 주된 요소가 된다. 오래된 나름의 역사를 지닌 장소는 사물들의 모습에서 존재와 부재를 가늠하게 하며 외부로 드러난 사물들의 모습에 기록되어진 시간은 개인적 삶의 가치에 대해 다시 돌아보게 한다. 옥인동 꼭대기의 누렇게 지는 해를 한 몸에 안고 서 있는 대문은 장소의 내부와 외부의 연결고리의 역할을 뒤로하고 이제는 경계의 의미만을 지닌 마르고 변색된 잉크칠이 된 벽과 다름없는 모양새로 부재된 시간을 드러내고 결코 인위적일 수 없는 자연물들이 또 다른 시간을 만들어낸다. 재개발의 여파로 내부의 제 몸을 다 드러낸 제기동의 집 안의 벽은 쓰임을 다한 콘센트를 대신해 틈새로 들어온 빛이 장소의 역사를 보여주며, 버무려진 시멘트가 살점같이 던져져 뭉개져 있는 이화동의 담 아래에는 구실을 못하는 사다리도 차마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엉겨 붙어 있다.

 

이렇듯 소소하지만 진정성을 간직한 삶의 장소는 개인이 만들어낸 장소의 이미지와 현존하는 사물들이 이루어낸 조화로운 장소감으로 이루어지며 이러한 진정성이 존재하는 장소로 존속하게 하는 요소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과 사물의 공존이다. 그리고 그 공존은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을 향해, 사라지기 위해 존재한다는 보드리야르의 말처럼 언젠가는 부재의 형태로 돌아가겠지만 공존이 남긴 흔적이 주는 장소의 감정은 그 자체로 가치를 증명한다.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가 간직한 사라지고 있는 장소와 또 여전히 살아갈 장소에서 이름 붙여진 사람과 사물들의 존재가 만들어낸 장소의 감정은 모든 존재함의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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