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것들의 조용한 풍요 - 전은희의 서울 그림들  (2014.11)                        

 

강수미 (미학, 동덕여대 교수)

 

“ 이 세상의 조용한 풍요는 사물에 부여한 이름의 모든 일탈이나 말하는 존재의 모든 상처의 순수한 첫 의미작용과 일체가 된다.” J. Rancière, 『사람들의 고향으로 가는 짧은 여행』

 

시적인 그림

느낌은 알겠는데 말로는 정확히 표현하기 힘들어서 흘려버리는 것들이 있다. 또 반대로 우리에게는 굳이 말로 할 필요도 없을 만큼 익숙해서 주목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앞서의 예로는 일상의 특별한 순간에 드는 기분, 이러저러한 일에서 느끼는 복합적 감정, 어떤 곳이나 상황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분위기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가령 해질녘 어스름한 빛을 받으며 좁은 골목길을 혼자 걸을 때 드는 기분이 그렇고, 그리워했던 누군가/무엇인가와 우연히 맞닥뜨렸을 때 만감이 교차하는 심리도 그러하며,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전혀 낯선 장소에서 느끼는 친숙한 분위기도 우리가 딱히 표현할 말이 없어 그저 흘려버리는 수많은 것들 가운데 하나다. 두 번째 경우에는 우리의 일상이 이뤄지는 시간과 공간, 생활의 장소들, 우리가 날마다 쓰거나 주변에 널린 채 잊혀져가는 각종 사물들이 속할 것이다. 이를테면 대한민국의 다수가 살아가는 살아있는 서울이라는 도시와 그 나날들, 우리 동네, 대동소이한 양식의 집들, 낡은 대문, 구식 초인종, 공산품 책상, 규격화된 컴퓨터, 오래된 서적, 가로등, 문패, 우편함, 담벼락 등등. 우리가 이 글에서 다루려는 작가 전은희의 그림들에 포착되고 있고, 가시화돼 있는 것들이 바로 이와 같은 것들이다. 즉 그녀의 회화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소소한 공간과 시간, 그리고 그 시공간 안에서 존재하고 발생하는 사물과 사건을 - 통상 우리가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기며 지나쳐버리는 그것들 - 사각형 화면 안에 담아내 하나의 표현으로, 하나의 의미로 형상화하는 작업인 것이다. 대체로 이런 작업은 대상에 대한 객관적이고 분석적인 접근보다는 정서적이고 심미적인 접근을 통해 이뤄진다. 그 점에서 전은희의 그림은 시적(詩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이 작가가 최근 몇 년간 작품의 주요 주제로 다루고 있는 ‘서울’ 혹은 “서울의 삶‘은 도시구조나 물리적 지형, 사회 정치 경제적 역학 면에서가 아니라 개인의 생활 경험과 기억, 서정적 분위기 및 사적 정서의 차원에서 이미지로 변형된다. 또 그녀의 그림에 빈번히 등장하는 켜켜이 쌓인 붉은 벽돌 담벼락, 이제는 보기 힘들어진 문패, 녹슨 우편함 등은 물건 자체라기보다는 그린 이의 주관적 시각과 감정에 따라 해석된 의미의 기호로 제시된다.

물론 전은희는 시적 함축, 시적 비약, 시적 수사(rhetoric)를 글쓰기 대신 그림 그리기를 통해서 구사한다는 점에서 시인과 다른 예술적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지만 말이다. 사실 이제까지 아주 많은 시인들이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말로 표현하기 어려워 스쳐 지나쳐버리는 것, 또는 전혀 특별할 것이 없어서 사람들이 간과해버리는 것에 관심을 갖고, 나아가 그런 것들로부터 시 예술을 구현해 왔다. 예컨대 19세기 프랑스의 서정시인 보들레르는 화려한 파리의 카페를 황홀한 듯 바라보는 “가난뱅이들의 눈” 중에서 “너무나 매혹당한 나머지 어리둥절하고 끝없는 즐거움 밖에 아무 것도 나타낼 수가 ”없는 어린 꼬마의 도취 상태를 『파리의 우울』로 노래하지 않았는가. 또 20세기 한국의 문제적 시인 기형도는 사람들의 손에서 멀어진 책의 운명을 시 「오래된 서적」에서 “오랫동안 나는 곰팡이 피어/ 나는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서 /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질서”라고 형상화하지 않았는가. 시 예술은 이렇게 일상의 상투어로 담아내기에는 복잡 미묘하고, 혹은 너무나 세속적이고 상투적이어서 굳이 특별한 취급을 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것들에 첫 시선을, 첫 이름을, 첫 의미를, 처음으로 미적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세상에 두드러지지 않고 존재하는 것들과 일체가 된다. 이를테면 랑시에르가 “이 세상의 조용한 풍요”라고 말한 것들과 하나가 될 수 있다.

 

나의 연민의 도시

전은희가 예컨대 한지 위에 채색 기법으로 서울 서촌의 어느 가난한 집 대문을 그린 그림 <옥인동>은 비록 그녀가 보를레르의 「가난뱅이의 눈」을 알았든 몰랐든 시인이 그 시에서 언어화해놓은 것과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궁핍한 외관을 하고 있지만 어딘가 사치스러움과 부유함을 갈망하는 마음이, 아주 비좁은 시멘트벽 사이에 불청객처럼 달린 외짝 대문임에도 아르누보 양식의 화려한 장식을 머리에 이고 있는 그 대문의 모양새를 통해 전해지는 것이다. 또 영감을 받았든 우연의 일치이든, 이 작가가 서울의 오래된 주택가를 돌아다니며 발견한 문패, 벽의 낙서, 우편함, 초인종 등을 작은 화판에 마치 그들의 자화상처럼 그린 다수의 연작 회화 <어떤 것들>은 기형도가 읊었던 「오래된 서적」의 감각과 닮아 보인다. 오랫동안 방치된, 방치됐기 때문에 어둡고 축축해진, 그래서 결국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어떤 것들’의 존재 상태로서 말이다. 그러한 분위기와 감각은 사람들이 흔히 ‘중요하다’거나 ‘귀하다’거나, 심지어 오늘 같은 세상에 서는 ‘비싸다’거나, ‘명품’이라거나 하는 중심에서는 낙오한 것들에 작가가 주목했기에 표현될 수 있었다. 말하자면 전은희가 지금도 어딘가에서 조용하게 세상의 풍요를 채우고 있는 ‘어떤 것들’에 연민어린 시선을 던진 결과인 것이다. 옥인동에서 이화동으로, 이화동에서 제기동으로, 혹은 마음먹은 대로, 틈나는 대로, 서울의 후미지고, 오래된 동네를 굽이굽이 돌아다닌 전은희에게 서울은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관점과 입장을 말하는 사람들이 말하듯 비정하고 살벌하며 파괴적인 곳이 아니다. 그렇다고 재개발을 통해 서울을 고급화, 상업화해온 이들이 자랑스럽게 외치듯이 첨단 도시도, 화려한 관광 도시도 아니다. 그와는 달리 전은희의 눈에 서울은 온화하고 살가우며 마음이 쌓여가는 곳으로 비춰졌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녀의 그림들이 우리에게 던지는 분위기, 서정, 느낌은 삶의 흔적이 어딘가에, 어떤 것들에 누적되어 있을 때만 지각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러한 삶의 흔적, 때로 그 흔적이 남루하고 보잘 것 없으며 더 이상 효용성이 없는 것일지라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나와 당신이 함께 살아온 공동체적 시공간의 세부(detail)를 잊지 않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작가 전은희는 그렇게 서울의 온도, 촉감, 심정을 연민어린 시선으로 한지 위에 그려 넣음으로써 놓치기 쉽고, 종종 무시하기까지 하는 서울이라는 세상의 조용한 풍요를 어느 정도 조명할 수 있었다.

 

 

오래된 집들을 배회하다가 이름 없는 이름들에 마주서다 (2013.4)

고충환 (미술평론)

전은희의 그림은 재현적이고 문학적이고 서사적이다. 이런 그림에서 주제는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그림 전체의 성격을 함축하거나 암시하는 경우가 많고, 그림 전체를 구분하면서 하나로 연이어주는 연결고리로서의 계기로 작용하기 쉽다. 어떤 식으로든 작가의 그림을 읽는데 결정적이거나 최소한 암시적인 실마리 역할을 한다. 그림들 각각은 저마다 다르지만 그렇게 다른 그림들에 어떤 일관성을 부여해주는 보이지 않는 계기이며, 상호보완적이고 보충적인 계기로서 작용한다. 그렇게 이 그림은 저 주제를 부르고 저 주제는 이 그림을 싸안는다.

 

벽, 공간의 기억(2009).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이 있다. 불통의 벽이고 단절의 벽이다. 그 벽은 벽 자체라기보다는 비유적인 벽이다. 불통의 느낌과 단절의 느낌을 벽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그렇게 그려진 벽 그림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어서 꽉 막힌 듯 답답했다. 이따금씩 하늘이 그림 속에 들여질 때조차 하늘은 오히려 벽의 요지부동을 강조할 뿐이었다. 그렇게 작가의 벽 그림은 인간관계에 대한 실존적 자의식의 표상이고 표출이었다. 그리고 자연스레 벽 자체에 시선이 머문다. 이처럼 벽 자체에 시선이 꽂히면서 반전이 일어난다. 불통과 단절의 계기로만 보였던 벽이 허물어지면서 자기를 내어준다. 벽은 알다시피 평면이다. 그 위에 그림을 그린 도화지와 같고, 삶의 흔적을 아로새긴 해묵은 노트와 같고, 시간의 지층이 켜켜이 내려앉은 빛바랜 사진첩과 같다. 아마도 작가는 자신의 유년시절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살아온 모습이 어슷비슷한 탓에 작가가 그린 삶의 흔적은 쉽게 공감을 얻는다.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벽 그림은 실존적 자의식으로부터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목가적인 감성 사이의 스펙트럼을 아우른다.

 

The written story(2009). 그렇게 작가는 삶의 흔적을 찾아 나선다. 표면적으론 타자의 삶의 흔적이지만, 그러나 그 흔적은 어느 정도 작가 자신의 삶의 흔적이기도 하다. 타자의 삶의 흔적에서 타자를 보고 자기를 본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 자기가 타자가 되고 타자가 자기가 된다. 감정이입을 매개로 자기와 타자가 동일시되는 심리적 공감 내지 동화현상이 일어나는 것. 그때 나는 지금 여기에 없었다. 그렇다면 그때 그곳에 있었던 나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인가. 사라졌다면 어디로 어떻게 사라진 것인가. 사실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숨어든 것이다. 지금 여기에 있는 나에게 깃든 것인데, 이처럼 깃들게 해주는 계기가 흔적이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에 있는 나는 말하자면 그때 그곳에 있었던 나의 흔적이다. 마찬가지로 작가가 마주한 자리에 정작 타자는 없다. 다만 허물어진 벽이나 내려앉은 지붕이 있을 뿐. 마당의 경계 너머로 웃자란 풀밭이 있을 뿐. 박제가 된 시간을 증언하듯 멈춰선 행글라이더 모형이 있을 뿐. 그렇지만 그 벽이며 지붕, 풀밭이며 모형에 타자의 삶의 흔적이 아로새겨진다. 타자는 말하자면 사물들에 자신의 삶을 흔적으로 남겨놓았던 것이다. 이렇게 사물들엔 존재의 흔적이 아로새겨지고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기술된다. 바로 텍스트들이다. 작가는 그 텍스트들이 들려주는 무언의 이야기를 헤집고 발굴하고 채집하고 분류하는 무슨 문헌학자 같고 고고학자 같다.

 

산책자의 시선(2010). 보기에 따라서 문헌학자와 고고학자는 룸펜과도 같다. 보들레르와 발터 벤야민이 산책자 내지 만보가로 명명했던 룸펜은 특히 도시유목과 관련해서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 마치 유유자적하는 소요유에서처럼 의식의 끈을 반쯤 내려놓고 도시며 도시의 변방을 어슬렁거리고 기웃거린다. 그렇게 어슬렁거리고 기웃거리며 걷다보면 도시의 세부들이 보이고 세목들이 눈에 들어온다. 흔히 삶을 길에다 비유한다. 어떤 길을 어떻게 갈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길을 그저 번거로운 과정이며 번잡한 수단으로 본다. 길 자체가 이미 삶인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당연 삶 자체가 이미 목적이듯 길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어슬렁거리고 기웃거리며 걷다보면 사람들이 버린 사물들이 보이고, 사물들에 아로새겨진 사람들의 흔적이 보인다. 그러므로 그 사물들이며 삶의 흔적을 발굴하고 기록하는 작가의 행위는 일종의 도시회화 내지 도시유목의 가능성을 예시해준다.

 

부재한 공간, 소리 없이 흐르는 시간(2011). 작가는 도시 중에서도 주로 변방을 어슬렁거리고 재개발현장을 기웃거린다. 도시면서도 도시 같지 않은 공간이며, 실제로도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그렇게 받아들여지는 공간이며, 도시기능이 일시적으로 멈춰선 잠정적인 장소들이다. 그 공간이며 장소들은 말하자면 화려한 도시의 인공불빛 아래 가린 도시의 그림자에 해당하고, 가능하다면 숨기고 싶은 도시의 폐부에 해당한다. 그 자체가 도시의 숨길이면서도 동시에 트라우마의 온상이기도 하다. 미셀 푸코는 실제로는 있는데 정작 사람들의 의식 속에선 그 존재의미가 지워진 장소를 초장소며 없는 장소를 뜻하는 헤테로토피아라는 말로서 명명한 적이 있다. 억압의 계기들이 해소되지 않은 채 차곡차곡 쟁여지는 그곳은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잠재력으로 인해 도시를 변화시킬 수 있는 혁명의 계기로까지 여겨진다. 도시의 변방이며 재개발현장이 바로 이런 헤테로토피아에 해당할 것이다. 그곳에서 도시의 기능은 일시적으로 멈춰선 상태라고 했다. 아마도 그렇게 일시적으로 멈춰선 상태는 영원히 멈춰 설지도 모른다. 그렇게 여차하면 도시를 수선할 수도 있었을 혁명의 계기는 한갓 흘러간 유토피아의 꽃노래로나 기억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 공간에 정작 타자는 없다. 그러나 타자는 자신의 타자성 혹은 존재감을 이처럼 치열하게 그리고 쓸쓸하게 그리고 멜랑콜릭하게 아로새겨 놓았다. 바로 소리 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 무심하게 지나치는 줄로만 알았던 시간 속에, 미래를 기약하는 시간 속에 새김질해 넣었다.

 

변방풍경(2012). 작가는 이처럼 변방풍경을 그린다. 타자가 타깃이면서도 정작 타자가 부재하는 풍경을 그린다. 타자성이 흔적을 매개로 타자를 강력하게 증언하는 흔적들의 풍경을 그리고 타자들의 풍경을 그린다. 이 모든 풍경의 지점들을 지지하는 것이 아마도 일종의 변방의식일 것이다. 자신을 의식적으로 변방 위에 세우고 경계 위에 세우는 것이다. 이런 변방의식 내지 경계 위의 자의식이야말로 작가의 작업을 뒷받침하는 인문학적 배경이며 실천논리를 위한 초석이 아닐까. 변방풍경을 그린다는 것, 변방에서 정작 치열한 삶의 흔적을 냄새 맡는다는 것(변방이라고 해서 그 자체가 곧 삶의 변방은 아닐 터), 부재 위로 존재의 흔적을 밀어 올린다는 것, 부재를 통해 존재를 증언하고 증명한다는 것, 수런거리는 소리를 그림으로 옮겨 그린다는 것, 이런 암시적인 지점 지점들이 어우러져서 이제는(아님 머잖아) 아카이브로나 남겨질 담벼락이며 골목길, 연탄재와 뽑기의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에게 변방(아님 변방의식)은 기억을 의미하기도 하고, 기억을 통한 의식의 확장을 의미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는 여운이나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기시감을 아우르는 기억의 확장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다.

 

Doorplate, 오래된 집(2013). 먼저, 오래된 집을 보자. 작가는 진작부터 벽과 함께 집을 그렸고, 변방풍경과 더불어 오래된 집을 그렸었다. 그 집은 살핀 바와 같이 그저 집이 아니었다. 꼭 그렇지는 않지만 오래된 집은 대개 빈집이거나 버려진 집이기 쉽다. 그리고 그렇게 비고 버려진 집에 흔적으로 남아있는 부재하는 것들을 그린 것이고, 부재하는 것들이 불러일으키는 존재론적이고 서정적인 환기력을 그린 것이다. 부재하는 존재의 풍경을 그린 것이고, 부재하는 것들이 흔적 위로 자기를 밀어올린 삶의 풍경을 그린 것이다. 그 풍경은 이처럼 사실은 삶의 풍경인 탓에 정체성 문제에 연동된다. 실존적 조건과 인간관계에 대한 부조리한 상황인식으로 유명한 비토 아콘치는 언젠가 자신의 작업과 관련해 내 집에서 나가달라고 주문한 적이 있다. 여기서 작업은 집의 메타포고 존재의 메타포고 자의식의 메타포고 정체성의 메타포로서 제시된다. 자신을 교회(집)에 비유한 예수가 교회에 득시글거리는 상인들을 채찍질로 내친 행위에서도 역시 집은 같은 의미를 의미한다. 그렇게 작가는 오래된 집을 매개로 타자의 흔적을 찾고, 타자의 흔적 위에 포개진 자신의 흔적을 찾는다. 그에게 집은 말하자면 존재의 집이었고 자의식의 집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도시의 변방을 어슬렁거리다가 아마도 우연하게 문패(혹은 명패)에 시선이 가닿았을 것이다. 집과 함께 사물을 그리던 작가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문패가 있는 집들은 현재 주인이 살고 있는 경우도 있고 주인이 없이 버려진 집인 경우도 있다. 여하튼 작가는 일일이 집들을 방문하면서 문패를 그릴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고, 이로써 타자를 그리던(흔적과 부재를 매개로 타자를 암시하던) 단계에서 타자와 직접 만나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하는 또 다른 단계로의 이행을 감행하고 있다. 이런 타자와의 직접 대면이나 관계 맺기가 추후 작가의 작업을 이끌 방향을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 수가 있겠다.

주지하다시피 문패(혹은 명패)에는 집주인의 이름이 적혀있다. 이 이름들은 무슨 의미인가. 꼭 그렇지는 않지만 어른이 된다는 것, 사회인이며 생활인이 된다는 것, 정상적이고 제도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어쩌면 자신의 이름을 상실해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고도로 제도화된 사회, 이를테면 군대나 감옥에서 이름 대신 특정 넘버로 개인이 호명되는 것도 이런 사실의 인식과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루이 알튀세는 이데올로기를 매개로 제도가 개인을 호출하고 호명한다고 했다. 이를테면 진보와 보수, 좌익과 우익 같은. 그런가하면 이름은 곧잘 직종이나 직함으로 대체되거나 약칭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이변(이 아무개 변호사)이나 김셈(김 아무개 선생님) 같은. 이처럼 개인의 이름은 규율에 묻히고 이데올로기에 묻히고 직능에 묻힌다. 무슨 말이고 무슨 의미인가. 사회적인 삶 속에서 나는 페르소나(페르소나의 원래 뜻은 가면이다)에 의해 대리 수행될 뿐, 정작 나 자신의 정체성의 입지는 줄어들고 덩달아 이름으로 호명될 수 있는 여지도 그만큼 쪼그라든다. 그렇게 나는 한없이 작아지고 줄어든다. 제도의 관점에서 개인의 이름은 그저 거추장스런 장애물일 뿐이다. 누가 개인에게(그리고 개인의 이름에) 관심을 갖는가.

이름 하면, 누구든 어릴 적 다정하게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던 누군가를 떠올리게 된다. 그렇게 이름으로 호명되던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시인 김춘수도 꽃을 꽃이라고 불러줄 때 그 때 비로소 나는 꽃에게 그리고 꽃은 나에게 의미 있는 무엇이 된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 논리를 그대로 적용하자면 개인이 이름 대신 규율로 이데올로기로 직능으로 호명될 때 나는 너에게 그리고 너는 나에게 결코 의미 있는 존재로서 가닿지 못한다는 말이 된다. 이로써 작가는 어릴 적 다정하게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던 누군가의 호명이 그립고, 서로 이름을 불러줌으로써 나는 너에게 그리고 너는 나에게 의미 있는 존재로서 거듭나고 싶다.

 

보이지 않는 풍경 (2013년 3월 미술과비평)

김성호(미술평론가)

전은희의 회화에는 도시 속 구석진 공간이 자리한다. 그것은 도심을 벗어난 재개발 지역에서 흔히 보게 되는 버려진 변방풍경(邊方風景)이다. 그녀에게서 그곳은 부재로 텅 비어있는 공간이지만, 동시에 존재의 그림자와 그것의 열망이 함께 호흡하는 풍경이기도 하다.

 

보이지 않는 사람

구석진 그곳, 때론 무너지기도 하고, 때론 허물어져가는 콘크리트 구조물 사이에서 일련의 사건들은 이미 ‘벌어진 채’로 존재한다. 벽돌을 쌓아 담을 만들던 아버지, 철문 위에 페인트칠을 하던 삼촌, 햇살 좋은 뜰에 빨래를 널던 어머니, 흙장난 하던 아이는 현재 그곳에 없지만 그들의 ‘시간-기억’은 그곳에 흔적으로 여전히 남아있다. 페인트칠이 박락된 담벼락, 지금은 말라버렸지만 누군가 돌보았음에 틀림없는 화분들, 굳게 담겨진 문, 그 위를 점령한 담쟁이 넝쿨들이 그것이다.

일견, 전은희의 ‘사람 없는 풍경’은 ‘누군가’가 ‘무엇인가’에 자리를 내주고 소멸한 부재의 풍경이다. 예를 들면, 담 너머로부터 낯선 침입을 감행한 장난감 행글라이더는 바람에 팔락이며 뜰에서 비행을 멈추고 조용한 명상에 잠기고 있는 중이고, 축대 위에 쓰러질 듯 버티고 있는 집에는 커다란 나무가 풍성한 녹색의 잎사귀들로 그늘을 만들고 있다. 누군가 분주히 나들던 철문은 자물쇠로 굳게 닫혀 있고, 대신 그 위에 빛바랜 광고 전단지들이 납작하게 매달려 피곤한 몸을 의탁한다.

사람 대신 사물이 대체하고 자리한 그녀의 ‘적막한 풍경’에는 사람들이란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지만, 그렇다고 딱히 그들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다. 위의 경우처럼 ‘무엇인가(사물)’의 몸에 ‘누군가(사람)’의 시간 흔적이 존재 근원으로 남겨져 있기 때문이다. 또는 ‘지금, 여기’의 시공간에서 ‘누군가(사람)’의 존재가 암시적으로 드리워져 있기도 하다. 작품〈사이 공간-오후〉은 대표적인 예이다. 여기서 열려진 창문으로 반쯤 걷혀 있는 커튼은 누군가 있는(혹은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어두운 공간 속으로 우리의 시선을 이끈다. 굳게 닫힌 문이 전면에 자리한 다른 작품들 앞에서 우리는 문을 잠그고 떠난 누군가의 귀가(歸家)를 기대하기도 한다.

이처럼 그녀의 회화에는 부재가 표면 위에 올라서 있지만 그 부재의 심층에는 존재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따라서 그녀의 작품에서 ‘보이는 무엇(사물)’이란 ‘보이지 않는 누군가(사람)’의 ‘존재/부재’를 동시에 증명하는 동인(動因)이 된다. 여기서 무엇보다 주요한 것은 이러한 ‘존재/부재의 동시 증명’이 부재의 이면에서 가쁘게 호흡하고 있는 작가의 ‘존재에 관한 열망’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라는 점이다.

 

보이지 않는 풍경

클라크(K. Clark)가 그의 저작 『Landscape into Art』(1949)에서 풍경이란 예술이 아니라 예술이 되는 것으로 고찰했듯이, 전은희에게서도 풍경은 그녀의 예술적 인식을 표상하는 매개체로 기능한다. 우리가 대개 ‘풍경’을 눈으로 대면하는 이미지(image)로 간주하고 그것으로부터 ‘심상풍경’이라고 하는 내면으로 대면하는 이미지, 즉 이미저리(imagery)를 떠올리는 것처럼, 전은희에게 있어 ‘보이는 풍경’이란 ‘보이지 않는 풍경’을 모색하기 위한 출발지점이다. 즉 그녀는 ‘보이는 풍경’(현실)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풍경’(예술)에 대해서 탐구한다.

이처럼 ‘시각적 인식’으로부터 ‘실존적 인식’을 이끌어내고자 하는 전은희의 조형 철학은 작품을 보는 관자로 하여금 ‘보이는 것’과 ‘느껴지는 것’ 사이에서의 의미론을 체험케 한다. 즉 ‘가시적 대상(visible object)’으로부터 관자들이 저마다의 ‘심적 표상(mental representation)’을 떠올려내게 만드는 것이다. 그녀의 작품에 드러난 피폐한 풍경을 대면하는 관자들은 그것과 유사한 풍경을 경험했던 과거의 어떤 시절을 떠올리거나 현재의 고독한 자신의 상황을 반추하기에 이르기도 할 것이다.

흥미롭게도 그녀의 작품에서 ‘보이는 풍경’으로부터 이끌어내는 ‘보이지 않는 풍경’이란 ‘벽(壁)’으로 상징된다. 이곳과 저곳을 나누고 주체와 객체를 분리시키는 벽이라는 경계는 구조상, ‘보이지 않는 무엇’을 필연적으로 은폐할 수밖에 없다. 그녀는 작품에서 이처럼 상징적인 ‘벽’으로부터 틈, 구멍을 만들거나 아예 벽을 허물어뜨려 이곳과 저곳, 주체와 객체 사이의 분리를 다시 회복시키려 한다. 보라. 시멘트 벽 틈새로 자라는 이끼 혹은 벽에 난 구멍 사이로 펼쳐지는 녹색의 풍경을.

생각해보자. 메를로 퐁티(M. Merleau-Ponty)가 인용하는, "풍경이 내 속에서 자신을 생각한다. 나는 풍경의 의식이다."라는 세잔의 언급은 우리에게 주체와 객체라는 것이 애초부터 상호 교환되는 역동적 관계임을 알려준다. 이처럼 전은희의 회화가 ‘보이는 풍경’으로부터 찾아나서는 ‘보이지 않는 풍경’이란 ‘존재의 결핍이 아닌 충만한 긍정의 공간으로서의 부재’에 관한 철학이자 ‘이미지와 이미저리’, ‘주체와 객체’를 화해, 소통시키려는 비주얼커뮤니케이션에 다름 아니라 할 것이다.

 

신(新)진경산수

그녀가 한국 뿐 아니라 아시아 곳곳으로 발품을 팔아 방문하고 카메라로 수집해 온 퇴락하고 피폐한 풍경들은 그녀의 작업실에서 회화로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더러는 사진의 프레임에 갇힌 풍경의 실제 요소들이 그녀의 회화에서는 첨삭되거나 연출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외려 그녀가 바라보는 풍경에 관한 주제의식을 극대화하는 장치가 된다. 게다가 장지 위에 한지를 배접하고 먹, 분채, 호분 등 전통재료를 사용하면서도 아크릴을 혼용하는 식의 창작방식은 오늘날의 남루한 ‘변방의 풍경’을 ‘실재보다 더 실재같이’ 표현하기에 적합해 보인다.

건물의 시멘트 질감을 표현하기 위해 한지를 사용하거나 한지 배면으로 침투하는 먹의 한계색을 보강하기 위해 아크릴을 군데군데 사용하는 방식은 이러한 버려진 도시 풍경을 현실감 있게 표현해내기에 적합해 보인다.

한편, 전시 현장에서 작품들을 선보일 때 고려되는 설치적 언어 역시 이러한 현실감을 증폭시키는 기제가 된다. 일테면 그녀는 개별 작품들을 병풍처럼 이어붙이거나 높낮이가 다르게 걸기도 하며 심지어 바닥에 올려놓는 방식으로 전시공간에 현실감 있는 긴장을 부여한다. 또는 전시장 한 곳을 실제의 벽처럼 작품으로 꾸미고 바닥 위에 연탄재, 낙엽들을 올려놓는 방식으로 전시공간에 현실감을 부여하기도 한다. 전은희의 이러한 설치 언어는 작품과 감상자 사이의 소통에 있어 심리적 파장을 일으키는 기제로 작동할 뿐만 아니라 현대한국화가 시도하는 신선한 실험이 되기에 이른다.

그녀의 용묵(用墨)과 용필(用筆)이 평범하면서도, 이처럼 진중한 무게의 현실감 있는 풍경화를 창출해 낼 수 있는 까닭은, 전통에 대한 부단한 실험과 더불어 ‘탈재현적 리얼리즘의 상상력’, 달리 말해 ‘보이는 풍경’ 속에 ‘보이지 않는 풍경’을 담아내는 그녀의 일련의 ‘부재에 관한 상상력’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녀의 작품은 가히 오늘날의 신(新)진경산수라 할 만하다. ●

 

 

시간과 흔적과 부재를 머금고 있는 벽

고충환(미술평론)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벽에 난 미미한 얼룩이나 크랙에서 풍경을 보는데, 자연과 같은 전원풍경을,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를, 그리고 심지어는 전쟁과 같은 인위적인 장면을 모두 벽에서 본다. 벽 자체에 내재된 이미지라기보다는 작가의 상상력이, 심안과 혜안이 보아낸 이미지일 것이다. 가시적인 것을 통해 비가시적인 것을 보아낸 직관적 이미지일 것이다.

이처럼 비가시적인 것을 암시하는 가시적인 풍경들이 있다. 벽이 그렇다. 말라붙은 담쟁이 넝쿨로 뒤덮인 벽이나 밝고 해진 벽을 보고 있으면 저만한 그림도 없지 싶다. 벽 자체는 사람이 만든 것이지만, 벽 위에 그려진 그림은 바람이 그린 것이고 비가 그린 것이고 시간이 그린 것이고 풍화가 그린 것이다. 이처럼 자연으로 하여금 그림을 그리게 하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하다. 그것은 단순히 자연이 그린 그림 이상으로, 사람이 만든 벽이 오랜 시간 자연에 노출되면서 점차 자연에 동화돼가는 느린 과정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그림 자체는 자연이 그린 것이지만, 정작 이를 통해서 암시되는 것은 자연의 속성이 아닌 사람의 흔적이다.그리고 그 흔적을 캐내고 냄새 맡기 위해선 약간의 우울한 기질(혹은 연민?)이 필요하다. 존재보다는 존재가 암시하는 부재(그 끝이 순수한 무에 닿아있는)에 공감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부재를 그리워하는 절실한 마음(아니면 최소한 알 수 없는 끌림이라도)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전은희는 벽을 그린다. 처음에 작가는 상징적 의미 때문에 벽을 그리기 시작했다. 벽은 나와 너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경계다. 그 경계 안쪽에서 나는 세상으로부터 보호받고 있다고 느끼고 고립돼 있다고 느낀다. 그리고 벽에 작은 창문을 냈고, 그 창문을 통해 너와 소통하기 시작했다. 불통의 벽이 소통의 벽이 된 것이며, 나에게로 닫혀있던 경계가 너에게로 통하는 네트워크로 확장된 것이다. 그렇게 나는 너와 연결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처럼 나는 너와 소통할 수 있게 되었지만, 나는 네가 그리고 너는 내가 될 수는 없으므로 이때의 소통은 불완전한 소통일 수밖에 없다. 너를 전제로 한 대화가 아닌, 너를 소외시킨 독백의 형태로서만 겨우 소통할 수가 있을 뿐이다(독백도 소통의 한 형식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그렇게 언젠가는 너에게 가닿을 수 있다고 한다면). 그렇게 벽은 견고했고, 창문이 위안이 될 수는 없었다. 창문은 마치 세상을 향한 소통의 문을 활짝 열어주었지만 그럴수록 현대인으로 하여금 익명 뒤에 숨고 자기 속에 숨게 만드는, 그래서 오히려 더 자기소외를 심화시킬 뿐인 윈도의 메타포 같다. 소셜네트워크는 다만 인간관계를 표면적으로만 피상적으로만 확장시켜줄 뿐이다. 타자를 전제하지 않은 주체의 불가능성이나 타자를 향한 윤리적 공감에 대한 레비나스의 전언에도 불구하고 그 공감이 나와 너 사이의 비가시적인 벽을 허물어줄 수는 없는 일이다. 어쩌면 벽은 실존적 조건이며 자의식의 표상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작가는 적어도 표면적으로 벽에서 꽉 막힌 고집을 보았고, 타협할 수 없는(처음부터 타협의 대상이 아닌) 자의식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소통가능성은 다른 곳(이를테면 상징적 의미가 아닌 실존적 의미)에서 찾아질 터였고, 따라서 작가는 그 다른 곳을 찾아 헤맨다.

도시에는 변두리가 있고, 변두리는 도심에도 있다(달동네). 그곳에는 도시로부터 소외된 사람들과 사물들이 모여 산다. 그렇게 모여 살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사람도 떠나고 사물도 떠난다. 그리고 미처 떠나지 못한 사물들은 사람들이 떠나면서 남기고 간 흔적과 함께 버려진다. 그렇게 재개발건축 현장에는 원주민들이 버리고 간 집터며 담장 그리고 사물들이 어우러져 부재의 풍경을 연출한다. 그리고 그렇게 부재하는 풍경을 자연이 접수하면서 또 다른 존재의 풍경을 만든다. 그래서 그곳은 무슨 부재와 존재 사이의 풍경 같다. 자기를 아로새기려는 흔적의 고집과 그 흔적을 몰아내려는 자연과의 분투로 치열한 풍경 같다.

그 풍경 속에 서면 삶의 흔적들이 무슨 혼령이나 망령들처럼 우르르 몰려온다. 그렇게 나는 타자의 삶 속으로 들어갈 수가 있고 타자의 삶을 엿볼 수가 있다. 그렇게 만나지는 타자(엄밀하게는 타자의 흔적)는 사실은 익명이지만, 왠지 익명 같지가 않고 살갑게 다가온다. 그가 가꾸던 텃밭이며, 세숫물로 씻어 내렸을 계단, 한때는 희고 알록달록한 빨래들로 치렁치렁했을 빨랫줄, 볕이 잘 드는 담장 밑에 앉아 햇볕을 쪼였을 의자며, 칼바람을 조금이나마 막아낼 요량으로 쪽 창문에 덧댄 합판조각 사이로 그가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고 그의 채취가 냄새 맡아질 것만 같다.

그렇게 작가는 상징적 의미가 아닌 실존적 의미(지금 여기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사건이며 일)를 매개로 비로소 타자와 만나질 수가 있었고, 타자와 소통할 수가 있었다. 그렇게 타자와 소통한다는 것, 타자의 삶(혹은 살?)속으로 들어간다는 것, 타자의 삶에 내 삶이 겹쳐진다는 것, 그리고 그로부터 나를 발견한다는 것, 그가 다름 아닌 나 자신일 수 있음을 인식한다는 것 모두가 작가 속으로 우르르 몰려들어와 작가의 인격의 일부가 될 수가 있었다. 작가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며, 자신의 그림을 통해서 환기시키고 싶은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작가는 시종 벽을 그렸다. 그림 스타일로 볼 때 결코 다작이 가능하거나 용이한 경우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꽤나 많은 벽들을 그렸다. 하도 많은 벽들을 그리다보니 하나같이 벽다움이 오롯해지는 경지에 이른 것 같다. 그 벽들은 심지어 사진보다 더 사실적이다. 그렇다고 무슨 극사실 회화를 떠올릴 필요는 없다. 여기서 사실적이라는 말은 시간과 흔적과 부재가 무슨 상징적인 기호처럼 그림의 표면 위를 겉도는(그래서 끼워 맞추는) 식이 아니라, 벽 속에 스며들고 아로새겨져 마침내는 벽의 일부가 된(벽에 무슨 실존 같은 것이 있다면, 벽의 실존이 된) 차원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그 벽의 질감(그 자체 타자의 삶의 질감이며 흔적의 질감이기도 한)은 직관적으로 일순간에 가능한 것은 아니다. 몇 번이고 거듭되는 덧칠을 통해서 종이 밑바닥에서부터 배어나오는 질감인 것이며, 그 자체가 타자의 삶의 질감이 작가 자신의 삶의 질감이 될 때까지 반복 덧칠해가는 동화의 과정이기도 하다. 그렇게 작가는 벽을 통해서 타자의 삶 속으로 스며들어갈 수가 있었고, 타자가 될 수가 있었다.

 

이역만리를 정처 없이 떠돌던 시절 시인 백석은 아마도 만주의 한 여인숙에 든다. 그리고 그 허름한 방의 흰 바람벽을 스크린 삼아 <흰 바람벽이 있어>란 시를 쓴다.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후략). 꼭 그렇지는 않지만 예나 지금이나 벽은 대개 쓸쓸한, 외로운, 가난한,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예비 된 캔버스며 스크린이다. 세상에 의지가지없는(혹은 의미를 찾지 못한) 사람들의 상상력으로 지은 지상의 처소다.

현대는 벽이 없는 시대다(밀란 쿤데라는 비극이 없는 시대라고 했다). 세상 끝까지 열려있는, 그래서 숨길 수도 숨을 수도 없는 시대다. 모든 것은 명명백백해야 한다. 그래서 오히려 숨길 수 있고 숨을 수 있는 벽이 그리운 시대다. 작가는 그렇게 너와 나를 가로막고 있는 벽이 아니라, 서로에게 스며드는 벽을, 서로의 가림막이며 몸이 되어주는 벽을 그리고 있었다.

벽(壁) ― 느린 감성의 기억 (2010. 8)

이관훈(큐레이터, Project Space 사루비아다방)

 

벽(壁) 풍경 시리즈 작품의 전시를 세 번째로 가지며 당분간 좀 더 벽 그림에 집착하고픈 전은희는 왜 이렇게 벽 풍경에 관심을 두는 것일까? 그는 벽의 역사나 사회적 개념 또는 사건을 맥락화 하는 작업이 아니라 도시 속에서 존재하는 벽과 벽면 그리고 사이공간이 근대화에서 현대화되어가는 과정에서 생기고 사라져가는 벽의 모습과 현상들을 눈으로 기록하고 표현할 뿐이다. 그러면서 그려지는 대상에서 다시 생각하고 고민하다 또다시 찾아서 그리고 사유하며 빠져든다. 벽과 공간에서 인고의 세월과 자연의 현상에 의해 생겨난 흔적의 환영들이 미술의 오랜 역사를 지닌 ‘그림’이라는 프레임 속으로 이접(移接)된다. 개발되지 않은 서울의 여기저기를 다니며 낡고 거친 벽들을 중심으로 사진을 찍고, 순간 기억되는 의미들을 기록하며 사라져가는 벽의 사사로운 얘기들을 서정적 풍경으로 때로는 서사적 풍경으로 그려 나간다.

전은희는 벽과 공간을 지나치게 변형?왜곡시키거나 극사실적인 표현을 구사하지 않는다. 거칠고 고지식한 성격답게 보여 지는 대상을 나름 프레임화 하여 자기 감성과 체질을 교접(交接)시키려 한다. 그래서 그림의 재현방식은 다소 서툴고 투박하며, 매끄럽지 못하고 탁하다. 하지만, 오히려 대상을 대상으로 보지 않고 자기만의 체질과 상상, 그리고 직관의 태도로 가져갈 수 있는 감성이 엿보이기에 새로운 가능성을 기대한다. 그 근거는 그림의 구조를 이루는 형(形)이 아닌 감추고 있는 몸짓(態)의 움직임 때문이다. 가령, 벽면의 화려한 질감이 아닌 곰팡이, 습기, 이끼 등 잘 드러나지 않는 것, 굳게 닫혀 진 문이나 창문, 무너질 것 같은 벽 등의 음(陰)적인 것을 소재로 한다. 또 하나는 느린 시선의 태도이다. 벽으로부터, 벽과 벽 사이에서, 벽 너머의 공간에서 보이지 않고, 숨을 쉬며, 느린 움직임의 현상들을 쉼 없이 사유한다는 것이다.필자의 입장에서는 아직 드러나지 않아 어설퍼 보이지만 그 속에 머물고 있는 그러한 사유 태도의 관점에서 보다 다양하고 폭넓게 시선을 산책한다면 원하는 形의 움직임을 자유로이 즐길 수 있는 시간을 맞이할 것으로 본다. 막 접어든 불혹의 나이, 오래전 학창시절에 학습되지 않았던 동시대의 서정적?서사적인 풍경이 이제 다시 새로운 학습을 겪은 그에게 멈출 수 없는 가벼움으로 다가간다. 인생의 반을 살아온 전은희는 겁 없는 20대와는 다른 도전으로 망설임 없이 견고하게 발라진 바름벽(plastered wall)을 감성의 전율로 뒤엎을 때이다.

 

바람을 간지럽히는 낮은 담 (2009. 4.)

글/ 백 곤 · 미학

 

 

덕수궁 돌담길을 떠올리면 괜히 가슴 한켠이 아늑해짐을 느낀다. 사랑하는 연인을 떠올리듯 돌담길에 대한 저마다의 기억들이 방울방울 피어난다. 여기서의 담(wall)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따뜻한 정(情)으로, 정겨운 설레임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다른 담이 있다. 그 담은 나와 타자를 구분하는 경계의 담이다. 각자의 영역을 규정하고, 단절과 차단을 의미하는 담은 거대한 벽으로 다가온다. 그 벽은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단지 그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소외자로 만든다. 담은 나를 타자로 내몬다. 왜냐하면 담은 세계와 나를 구분하는 공허한 벽돌이기 때문이다.

1. 막힘의 담

작가 전은희는 담을 화폭에 옮긴다. 그녀의 담은 답답하게 막혀있다. 거대한 담은 출구도 없이 시선을 차단한다. 그녀에게 담은 위협의 존재, 분리의 벽으로 다가온다. 공간에 놓인 담은 그 담을 둘러싼 주변공간을 둘로 갈라놓는다. 그 갈라짐은 나와 타인의 구분이기도 하고, 나와 나의 인식 사이에 놓인 자리다툼의 장소이기도 하다. 담은 두 벽을 가진다. 나를 안전하게 지키는 안쪽의 벽과 타인의 자리에서 다른 영역을 인정해야 하는 바깥쪽의 벽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는 공허한 콘크리트의 빈공간이 자리한다. 우리의 인식은 결코 담 외부에서 생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담이라는 단어규정 속에서 드러난다. 벽으로의 담은 항상 나를 안전하게 지키면서 나를 위협한다. 도대체 담 너머에는 무엇일 있는 것일까? 베를린 장벽을 사이에 둔 이념대립의 종착역은 허물어버림에 있었다. 그러나 담을 허문다고 모든 것의 경계가 사라지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베를린 장벽이라는 물리적인 벽보다 더 큰 벽, 바로 차별과 편견의 벽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의 뇌에서 시뮬레이션 되는 상상의 벽이다. 어느 벽이 더 견고한가? 실제적인 막혀있음의 벽과 가상의 막힘, 혹은 믿음의 막힘을 뚫을 수 있는 용기와 가능성은 결코 호응관계를 이루지 않는다. 작가 전은희의 담은 바로 이러한 막힘을 의미한다. 공간의 막힘, 인식의 막힘, 의식의 막힘은 거대한 담벼락으로 답답하게 다가온다. 그녀에게 담은 하늘을 보듯 올려다보아야 할 높은 벽이자 두려움과 위협의 대상이다. 그것은 고립과 배타, 절대적인 것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녀의 담이 이러한 막힘이라고 했을 때, 우리는 그녀의 담에서 어떠한 것들을 느낄 수 있는가? 단지 높은 담벼락을 재현하여 관객들로 하여금 답답함을 느껴지게끔 하는 것이 그녀의 의도인가? 분명 아닐 것이다. 그녀의 작품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녀 스스로가 자신의 담을 무너뜨리고자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녀는 허물어지기 직전의 오래된 담을 찾아 나선다. 그 오래된 담은 지저분하고 반듯하지 않다. 그것은 마치 오랜 시간 견고성을 강조하던 콘크리트의 신화가 무너지기 직전의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현실의 모습을 보여줌과 같다. 그것은 오랜 편견과 가식을 의미한다. 담이 무너지면 나와 타자의 공간은 나와 또 다른 나의 공간으로 변환된다. 담 안쪽의 나와 담 바깥쪽의 타자와의 경계에서 이제 남은 것은 낡은 인식의 고정태인 흐물흐물해진 담의 관념 밖에 없다. 담은 결코 형태를 가진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경계지움의 추상성을 내포하는 내부의 공간이다. 그 공간은 소외를 원한다. 나를 타인과 구분하고, 타인을 타인과 구분하기 위한 소외, 스스로 벽 밑에서 자신을 나약하게 만드는 소외 말이다. 우리가 다가가지 못하는 삼엄한 경계의 벽, 그 벽은 이제 더 이상 견고한 벽이 아니라,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우리들의 삶의 역사 그 자체이다. 작가는 담이 가지고 있던 긴긴 세월의 흔적을 찾아내려고 애쓴다. 거기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다. 마치 소작농이 못된 지주의 벽에 낙서를 하듯 몹쓸 담이 있는가 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살았던 삶의 애환이 담긴 이끼 낀 아련한 담도 있다. 이제 곧 무너져 흔적조차 사라지고, 사람들의 인식 속에나 남아있을 무시무시한 관념의 벽을, 그녀는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삶의 형태를 지닌 호흡하는 담으로 받아들인다.

2. 대화하는 담

그녀의 담은 세월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노랗고 이끼 끼고 지저분한 담은 이제 무너진다. 무너뜨림의 주체는 바로 자연이다. 그러나 담은 다시 경계를 생성한다. 나 자신과 자연세계를 경계 짓고, 나와 자연을 인식하게끔 한다. 곧 나와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나의 모습과 조우하게 된다. 물론 그 벽은 인간에 의해 다시 새로운 콘크리트 벽으로 대체될 것이지만 말이다. 흔적 없는 시골 철도역의 오래된 담처럼 아련함과 지나간 시대의 추억을 마치 내 존재의 안식처인양 끊임없이 내안의 타자를 확인해야 하는 우리들의 모습은 그녀가 표현한 것처럼 낡고, 지저분한 담벼락을 닮아있다. 담은 낡고 거친 호흡으로 우리들의 편견에 대해, 두려움에 대해, 경계에 대해 폭로한다. 담벼락의 끝자락엔 작은 골목이 생겨난다. 그 골목은 무너진 담을 쫓아 끝없이 길어진다. 그 길은 작가의 무의식과 연결된다. 그 무의식은 도시를 형성하는 벽과 사회를 형성하는 벽 사이에 세워진 경계의 공간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경계가 아니라 접합의 공간이며, 타인과 자신을 구분하지 않고 자신과 자신안의 타인을 모두 수용한다.

담을 비집고 나온 붉은 가스파이프들은 생동하는 삶의 모습을 드러내며 타인과 나를 끊임없이 연결시킨다. 담은 이제 벽이 아니라 하나의 삶의 공간이 된다. 그리하여 작은 창을 내어 빛을 받아들인다. 그녀의 작품에는 이러한 작은 창들이 생성되는 과정이 잘 묘사되어 있다. 처음에는 무너진 벽돌에 의한 뚫림의 공간들이 차츰 미리 구성된 창들로 대체된다. 담은 이제 자신을 무너뜨리지 않으면서 타자를 받아들인다. 거기엔 새가 들어와 노래할 수 도 있고, 다람쥐가 비를 피해 잠시 들를 수도 있다. 결국 그녀는 담을 통해 나를 둘러싼 삶의 시간들을 기록하고, 그 무상한 담을 바라볼 때 약간의 회고의 시간이 필요함을 드러낸다. 그녀는 오래된 벽에 새겨진 나와 타인간의 거리를 인식하고, 그 거리만큼의 두께를 거친 붓질로 표현한다. 그녀의 예술에 대한 붓질이 거칠면 거칠수록 담은 더더욱 고즈넉해진다. 거친 담을 받아드는 그녀의 고운 캔버스는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수많은 이야기가 있는 낡은 담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제 그녀의 담은 타인을 향해, 나를 향해 바라보는 만큼의 열린 공간을 제공한다. 그리하여 담은 스스로 다가와 나에게 말을 건다.

 

현대를 살아가는 회색빛 콘크리트의 꽉 찬 공허를 무너뜨리듯, 돌담은 각각의 돌과 돌 사이를 비어있음의 공간으로 메운다. 돌담은 마치 제주도의 그것처럼 거센 바람을 모두 막아낸다. 그 돌담은 나와 타인을 구분하는 차단으로써의 담이 아니라 자연과 동화하기를 원하는 낮은 담이다. 바람이 흘러가야 한다는 진리를 엉기성기 돌들로 비워내고, 지나가는 바람을 간지럽히는 담은 삶의 소소한 흔적들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전은희의 담은 바로 이렇게 나와 타인, 그리고 자연과 관계하는 낮은 담이다.